<책> 삶을 흔들리게 하는 것들 - 곽재구 산문집 <동방미디어,1997>

2004. 5. 14. 00:00

'길위의 꿈' 에 관한 친구의 얘기로 인해 올리게 되었습니다.

작년 여름 비오던 날에 이 글과 함께 적었던 일기가 있었습니다.

귀찮은 마음에 같이 올려보려 했지만, 차마 올리진 못하겠습니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때 일기를 다시 읽어보니 기분이 참 묘한것이...

이 책의 소개는 다음번으로 미뤄야 겠습니다.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은 책이기에 이런식으로 엉겁결에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길위의 꿈

스무 살 무렵 여행을 떠날 때면 나는 꼭 선물을 준비하곤 했다. 길 위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에게 줄 선물이었다.
선물의 내용은 변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내가 쓴 시 몇 편들, 길 위에서 내가 스케치한 연필그림들과 그 위에 새겨진 시 몇 편들이 전부였다.
여행 중 나는 항상 긴장을 하였다. 언제 눈앞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나타날지 모르므로, 길 위에 펼쳐지는 풍경모두를 유심히 살폈다.
당신이 이번 여행 중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시간들이 내 여행의 어느 순간에 마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연필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시를 새기는 순간이 늘 행복했다.
그러나 길 위에서 내가 선물을 건넬 대상을 찾는다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었다. 아름다운 사람을 찾느라 열중하다 보면 여행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고 선물은 부질없이 내 수중에 남아 있기 마련이었다. 여행의 맨끝에서 나는 내가 마련한 선물을 국밥집의 연탄난로 속에 집어넣은 채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불빛을 바라보기도 했고 더러는 강물 위에 띄어 보내기도 했다.
길 위에서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사람에게 선물을 주겠다는 내 꿈은 어쩌면 영영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스무 살이 포함된 나이가 다 지나갈 무렵이었다. 그 때 나는 흑산도로 가는 뱃전에 있었다. 내 목적지는 가거도(소흑산도)였고 가거도행 배를 타기위해서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흑산도에서 하룻밤을 묵어야만 했다.
그 뱃전에서 나는 처음으로 선물을 줄 대상을 찾았다. 스무 살을 두셋쯤 넘긴 아가씨였으며 독특하게 디자인된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옷자락과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는 뱃머리의 맨 앞부분에 홀로 서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본 인상은 그녀가 그대로 바다에 빠져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늘을 포함한 모든 것이 내게 확신을 주었다.
“당신이 이번 여행에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나는 선물을 그녀에게 전해 주었다. 그녀는 내가 쓴 몇 편의 시들을 읽으며 빙그레 웃었다.
배가 흑산도의 진리항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뱃전에 나란히 서서 꽤 많은 이야기를 했다. 여행중에 늘 선물을 준비하느냐고 그녀가 물었다. 그렇다고 나는 대답했다. 자신이 몇 번째쯤 되느냐고 그녀가 또 물었다. 나는 처음이라고 대답했다.
진리항에 내리면서 그녀는 왜 이름을 묻지 않느냐고 내게 물었다. 당신은 내가 길 위에서 선물을 준 첫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아름다운 것은 이름이 없는 것이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여관에서 자리에 누워 있는 내내 그녀 생각이 났다. 오징어잡이배의 불빛이 창 밖을 훤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 삶을 흔들리게 하는 것들 : 곽재구 님의 산문집 중 '길위의 꿈'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