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눈뜨면 없어라

2008. 9. 5.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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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혹은 소설가 김한길씨의 젊었을 적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의 일기 입니다.

미국생활을 마치고서 펴낸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솔직하게 가감없이 써놓은 것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저도 일기를 쓰고 간간히 그 속에 써 있던 글을 블로그에 올리곤 하지만,

부끄러운 마음에 이만한 솔직함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가 권해주었던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나서 한동안 헌 책방들을 전전 했었습니다.

당시에는 절판되었던 책이었기에 헌 책방에서만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운이 좋은 탓인지 저자의 싸인본 두 권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한권은 다른 사람에게 읽어보라고 주었는데, 읽고 나서 한참뒤에 되돌아 오더군요.

그래서 다시 두 권을 가지고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신 많은 분들이 최고라 부르는 부분은 이 책의 마지막에 있는 저자의 에필로그에 올라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초판 1쇄에는 에필로그 부분이 없었더군요.

다이어리에 프린터해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글임에도 블로그에 올려놓지 않은 것 같아 늦게나마 올려봅니다.



 

결혼생활 5년 동안, 우리가 함께 지난 시간은 그 절반쯤이었을 것이다.

그 절반의 절반 이상의 밤을 나나 그녀 가운데 하나 혹은 둘다 밤을 새워 일하거나 공부해야 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모든 기쁨과 쾌락을 일단 유보해 두고, 그것들은 나중에 더 크게 왕창 한꺼번에 누리기로 하고, 우리는 주말여행이나 영화구경이나 댄스파티나 쇼핑이나 피크닉을 극도로 절제했다.


그즈음의 그녀가 간혹 내게 말했었다.

“당신은 마치 행복해질까봐 겁내는 사람 같아요.”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다섯 살 때였나봐요. 어느 날 동네에서 놀고 있었는데

피아노를 실은 트럭이 와서 우리 집 앞에 서는 거에요.

난 지금도 그때의 흥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 아빠가 바로 그 시절을 놓치고 몇 년 뒤에 피아노 백대를 사줬다고 해도 내게 그런 감격을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을 거에요.“


서울의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내게 이런 편지를 보내시곤 했다.

“한길아, 어떤 때의 시련은 큰 그릇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시련이란 보통의 그릇을 찌그려뜨려 놓기가 일쑤란다.”


anyway, 미국생활 5년만에 그녀는 변호사가 되었고, 나는 신문사의 지사장이 되었다. 현재의 교포사회에서는 젊은 부부의 성공사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방 하나짜리 셋집에서 벗어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의 3층짜리 새 집을 지어 이사한 한 달 뒤에,그녀와 나는 결혼생활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바꾸어 말하면, 이혼에 성공했다. 그때 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버린 대가로...


김한길의 <눈뜨면 없어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