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2009. 6. 18. 09:27카테고리 없음


대학 1학년때 레포트와 학업 과정을 핑게로 386 컴퓨터를 구입했었다.
허큘리스 모니터 (흑백 모니터 : 칼라 모니터는 눈이 쉽게 나빠진다는 이유와 '가격'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때문에..ㅡㅡ;)에 하드 디스크 40 메가의, 지금과 비교해보면 뭐 휴대폰보다 못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OS 는 도스를 사용하고, 1.2메가 짜리 5.25 인치의 플로피 디스크를 통해 레포트를 저장하기도 하고, 플로피 디스크 수십장을 들고 다니며 친구들 컴퓨터의 몇가지 게임들을 분할 압축방식으로 받아오기도 했었다. 다만 모니터가 흑백이었던 관계로 가능했던 게임들은 '삼국지 2' , '대항해시대 1' 등이었고, 여러장의 플로피 디스크를 동원해서 분할 압축을 받았던, '프린세스 메이커',색색의 퍼즐 게임들은 다운로드 즉시 설치하던 중간에 삭제를 할 수 밖에 없었었다.

학기중에야 컴퓨터의 용도가 레포트였는지, 게임이었는지 부모님께서 알 수가 없었지만, 방학때에는 컴퓨터앞에 장시간 앉아있다가 핀잔을 듣기도 했었고, 때로는 혼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도 게임이 쓸모없지만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별 말씀을 하지 않으실거라는 얇팍한 계산 속에 아버지께 컴퓨터 게임중에 '바둑' 게임이 있다고 알려드렸었다. 백돌과 흑돌, 그리고 바둑판만 있으면 되었던 이 게임은 흑백 모니터에서도 작동이 어렵지 않았었다.

첫 시도는 괜찮은 듯 보였었다. 바둑을 너무 좋아하시던 아버지께서 흥미를 가지셨고, 초급레벨부터 점차 한 판, 한 판 바둑을 두고 계셨었다. 몇시간 쯤 지났을까? 갑자기 아버지께서 부르시면서 컴퓨터가 고장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깜짝 놀라 방으로 달려가서 컴퓨터를 바라보니 "Thinking..." 이라는 메시지만 깜빡이고, 엄청난 속도로 하드 디스크가 돌아가는 소리만 나는 것이었다. 분명 컴퓨터가 다운되었을 때의 증상은 아니었고, 어쩌다 그러셨는지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었다.

30년 가까이 바둑을 거의 유일한 취미생활로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께는 이 어설펐던 흑백모니터를 가진 386 컴퓨터에서 실행되는 바둑 게임이 너무 수준이 낮으셨던 모양이었다, 초급, 중급을 각각 한판씩 해보신 아버지께서는 고급에서 첫 판을 시작하셨고, 10여수가 진행되자 컴퓨터가 점점 다음 수에 대해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모양이었다. 처음에 5분을 생각했던 것이 점점 10분으로 가고 있었고, 급기야는 종일 '생각'만을 하며 다음 수를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긴 역사상 똑같은 판이 나온 적이 없다는 바둑에서 고작 몇 메가바이트로 움직였던 게임은 컴퓨터에 데이터가 없는 수에 대해서 대처할 능력 또한 없었던 것이었다. "장고 끝에 악수둔다." 라는 바둑계의 격언같이 오랜 시간을 생각해서 엉뚱한 곳에 행보를 하곤 했었으니...

결국 나의 어설픈 의도는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그딴 거 할 것이 못되더라. 게임을 너무 좋아하면 안좋으니 컴퓨터를 멀리해라." 라는 아버지의 한 마디로 끝을 맺고야 말았었다. 그 후 시간이 지나고 486 컴퓨터를 지나 펜티엄 컴퓨터가 나왔을 때 다시 한번 같은 게임을 실행해 보았더니, 이젠 '생각' 하는 시간은 짧아졌으나 여전히 엉뚱한 곳으로 행보를 하는 습관은 고쳐지질 못했었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실은 요즘 내 상태가 바로 그 당시 내 첫 컴퓨터가 바둑을 두면서 보여주던 "Thinking..." 이 내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일 것이다.
오랜 "생각" 중에 악수를 두지는 말아야 할 것인데 말이다.